Frost Circle: 체셔와 최하람
※ 있었을 수도, 없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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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마곡: Sevdaliza - Human]
"왜 그랬어."
하람의 눈동자는 줄곧 체스 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고심 끝에 화이트 폰(Pawn)을 한 칸 앞으로 밀었다. 그러자 체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뭘?"
"연아. 내가 너랑 알고 지낸 세월만 해도 벌써 몇 년인데……, 아직도 널 다 모르는 것 같아?"
그가 검은 나이트(Knight)를 집어 옮겼다. 그의 것이 하람의 폰 옆으로 바싹 붙었다.
"글쎄……, 돌려 말하니까 뭔지 잘 모르겠는데."
"머리 하난 기똥차게 좋은 놈이 왜 이럴까. 구라를 칠 거면 상대를 봐가면서 쳐야지."
"……."
"……아니, 가리면서."
하람은 평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폰을 한 칸 더 전진시켰다.
하지만, 체셔는 공간 속 미묘하게 다른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이내 그가 의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된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뻔뻔함은 체셔의 특기이고, 본능이자 본성이다.
"미안, 내가 형에 비하면 빡대가리라서 말이야. 알아듣게 좀 얘기해 줄래? 응? 쉽게, 쉽게. 얼마나 좋아."
체셔의 입가에 어스름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자 하람이 픽 실소를 터뜨렸다.
"빡대가리라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웃다 숨넘어가겠다, 연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을 보니 구태여 꼬집을 생각은 없는 듯싶었다. 그 사이, 체셔가 나이트를 옮겨 화이트 폰을 넘어뜨렸다.
"형, 있잖아……."
"……."
"난 형이 참 좋아."
하람은 사라져버린 폰 대신 비숍(Bishop)을 이동시켰다. 전세가 뒤집혔다. 체셔의 나이트가 궁지에 몰린 것이다.
궁리하던 체셔는 결국 오갈 데 없는 나이트를 놔 두고 다른 길을 개방하기 위해 검은 폰을 들었다. 잠깐 끊어졌던 말씨가 다시금 들리기 시작했다.
"형한테는 배울 점이 많거든."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체셔가 하람에게로 고갯짓했다.
"그런 거."
실로, 하람이 비숍을 써 조용히 체셔의 폰을 먹고 있었다. 체셔가 담담한 어투로 행동거지를 가리키자 하람의 입 새로 헛바람이 삐져나왔다. 한순간에 김이 빠져버린 것이다.
"내심 기대했는데……, 이런 건 너무 별 거 없잖아."
"하하, 그런가."
체셔가 나직이 웃으며 퀸(Queen)을 두 칸 움직였다. 그것을 본 하람의 이마 근육이 삐죽 올라서 몇 개의 주름을 만들어냈다.
"벌써 퀸이야?"
"난 형이 퀸을 빨리 움직일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야."
하람은 자신의 비숍을 끝에서 끝, 가장자리로 몰았다. 참으로 아리송한 위치 선택이었다.
체셔는 그의 계획을 파악하기 위해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나 나오는 답은 결국 하나였다. 시선을 끌기 위한 희생양, 혹은 쉽게 버릴 수 있는 카드.
하람이 나직이 읊조렸다.
"퀸은 제일 아깝고, 소중한 말이야."
그가 비숍에서 손을 떼자, 체셔가 룩(Rook)을 일직선으로 전진시켜 그것을 튕겨냈다. 하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동요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서 이렇게 잔챙이들을 앞세워 내보낸 후에 적절한 때가 오면 써먹는 거지."
하람의 일침에도 체셔는 별 감흥이 없는 눈치였다. 관심이 쏠린 곳은 진작에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람이 나이트에 손을 대는 것을 관찰하다 자신의 검은 퀸을 들어 가로로 세 칸 이동시켰다.
"그러다 다 털려, 형."
"내가 이길 것 같은데."
"왜지?"
대답 않고 슬며시 입꼬리를 말던 하람이 불시에 폰을 움직여 길을 열었다. 폰의 뒤에 갇혀 있던 비숍을 해방시킨 것이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네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여버리면, 정작 필요한 시점에 써야 될 말이 줄어들잖아."
"그러지 않게끔 머리를 쓰면 되지."
"그런 건 나만 할 수 있는 거야."
하람은 체스판에서 눈을 떼고 싱긋 미소 지어 보였다. 햇살을 머금은 어린잎처럼 상냥한 웃음이었다.
체셔의 한쪽 눈썹이 아주 느릿하게, 슬며시 들렸다. 내처 그는 제 퀸을 옮겨 전쟁터의 정중앙에 안착시켰다.
"그래? 체크(Check)."
"쉽게는 안 되지."
하람이 화이트 비숍을 써 재빠르게 킹(King)을 보호했다. 그가 위기를 넘기자 체셔의 눈시울이 좁아졌다.
"오호, 방패를 세우시겠다……. 얍삽해서 약오르는데?"
"왕은 나중에 죽어. 진짜, 마지막 순간에."
체셔는 화이트 비숍이 자신의 퀸을 먹지 못하도록 가로 방향으로 한 칸 물렀다.
"왕이 일찍 죽어버리면 그 자리에서 체스가 끝나는 것처럼, 세상도 그래."
중얼거리듯 말한 하람이 다시 비숍을 써 체셔의 나이트를 해치웠다.
참으로 의아했다. 대체 왜 그가 비숍만을 굴리는지, 강력한 말인 퀸이나 룩을 잠자코 놔둔 채 굳이 비숍만 애용하는 건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체셔는 의중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비숍을 꺼내기 위해 다시 폰을 움직였다. 하람은 체셔를 가만히 응시하며 말씨를 이었다.
"부하가 죽거나, 부하들이 죽거나. 그런 건 상관없어. 정말 '끝'이라고 이를 수 있는 땐 왕이 최후를 맞았을 때야."
"……."
"몸 바쳐 싸운 부하들에게는 억울한 얘기겠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게 현실이야."
하람은 입을 닫는 순간, 비숍을 이동시켜 체셔의 룩을 없앴다. 한 번에 저지르기엔 상당히 과감한 거리였다.
그러자 체셔가 자신의 비숍을 대각선으로 한 칸 밀었다. 체스판 위를 마구잡이로 배회하던 하람의 비숍이 비로소 자취를 감추었다.
오랜 시간 큰 역할을 해 오던 자신의 말이 사라지자 하람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조금 뒤, 그가 대화를 지속했다.
"세상은 잔혹해. 늘 인간에게 끝없는 미로를 헤쳐 나가라 하거든. 그 미로 속엔 수없이 많은 뱀이 도사리고 있어. 송곳니에 치명적인 독을 품은, 독사들 말야."
"……."
"살아남기 위해선 뱀을 죽일 수 있는 그 무언가가 돼야 해."
말을 하는 도중, 하람의 화이트 룩이 체스판을 직선으로 가로질렀다. 체셔의 비숍은 별안간 달려온 룩에 의해 넘어져 버렸다.
체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런 때에 써먹네. 그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곤 물었다.
"그래?"
"그래."
"그래서 형은 뭐가 됐다고 생각해? 개구리야, 아니면 독수리야?"
체셔는 질문을 마치며 미리 대기시켜 놓았던 퀸으로 하람의 룩을 잡았다. 화이트 룩이 넘어지는 것을 관망하던 하람이 약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글쎄, 그건 다른 사람들이 알겠지?"
"그런가."
하람이 느긋하게 고개를 주억이며 퀸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체셔가 화두를 바꾸었다.
"퀸, 이제 쓰려고?"
"써야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가 퀸을 일직선으로 쭉 밀어 체셔의 비숍 앞에 두었다.
……음? 체셔는 재차 의아했다. 한 칸만 더 가면 내 퀸을 잡는 건데, 왜 앞에 멈춰 세우는 거지? 쓰러뜨리지 않고 굳이 바로 앞에 두는 이유는?
그는 하람이 후에 무엇을 움직일지 확률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최하람의 수를 읽어야 하지만, 내 수를 읽혀서는 안 된다.
머리를 짜내던 체셔가 룩을 움직였다. 하람의 퀸이 검은 룩에게 잡힐 난관에 봉착했다. 그제서야 하람이 퀸을 움직여 검은 비숍을 잡았다. 그의 입에서 자그마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그렇지, 이렇게 돼야지."
"아깝네."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하람의 얼굴은 아주 평온했다.
그럼 다음 작전, 체셔가 룩을 한 칸 움직이자 하람은 퀸을 대각선으로 대피시켰다. 그 때문에 하람의 킹이 보호받지 못한 채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게 되었다. 체셔는 무방비 상태인 하얀 킹을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체크."
하지만 하람의 입매는 여유로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쉽게는 안 된다니까."
"해 봐, 그럼."
그때, 하람의 폰이 체셔의 룩을 넘어뜨렸다. 그제야 체셔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방심했다.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폰은 첫 순서에 두 칸 이동할 수 있다는 걸 잠시 잊고 말았다. 그렇게나 기본적인 것을.
체셔가 눈썹을 까딱거렸다. 최하람, 어째 오늘 따라 유독 말을 걸면서 정신을 흩뜨려 놓더라니……. 아니면, 내가 제법 긴장하고 있다거나.
체셔는 애써 굳은 표정을 녹이며 자신의 퀸을 밀었다. 어떠한 말도 잡을 수 없는 위치였다. 움직임을 관찰하던 하람이 킹을 대각선 방향으로 한 칸 옮겼다. 그가 작게 속삭였다.
"왕이 움직인다는 건, 최후의 순간이라는 소리야."
그러자 체셔가 퀸을 밀어 하람의 나이트를 먹었다. 하람은 제자리를 지키던 폰을 움직여 검은 퀸을 튕겨냈다. 체셔의 퀸이 하람의 손아귀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최고의 병기를 잃었음에도 굉장히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엔 완벽한 '체크메이트'."
체크메이트(Checkmate)를 읊조린 체셔가 검은 룩으로 체스판을 시원하게 가로질렀다. 결국 하람의 킹은 체셔의 룩에게 잠식당하고 말았다.
자신의 킹이 넘어지는 것을 응망하던 하람이 머리 위로 팔을 뻗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당했네."
"져 줬잖아. 모를 줄 알고?"
예리한 지적에 체스 말을 정리하던 하람이 경쾌하게 홍소했다.
"들켰네."
"너무 티 나. 누가 봐도 알겠어."
"그렇긴 했지? 연기는 어려워."
체셔도 그를 따라 작게 웃어 보였다.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했는데, 마무리가 좀 아쉬웠어. 결말이 형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아하하, 연이 너랑 내가 제대로 체스 두면 아마 반나절은 걸려야 승부가 날 걸."
"그건 인정."
하람이 뒷정리를 마친 체스판을 접어 테이블 밑으로 숨겼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테이블이 금세 깔끔해졌다.
"이런 건 얼마든 져 줄 수 있지."
"……."
"그런데, 다른 데선 안 져."
목소리는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르고 간결했다.
체셔와 하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주시하며 소리 없는 눈싸움을 지속했다. 그들 사이에 묘하고도 살벌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전쟁의 서막이었다.